섬진강 21

누이에게

 

누이야

오늘도 나는 해거름에 넋 놓아

강 건너 묵어가는 밭들을 바라본다.

어릴 때 너를 업어 잠재우며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을 보노라면

언제는 패고

언제는 쓰러졌다 일어나

무릎 짚고 익어 있던

앞산 보리들을 바라보며

나는 너의 가지런한 숨소리를 들었었다.

누이야

나는 그때

깍지 낀 내 손이 저려왔어도

무거운 줄을 몰랐었다.

어머니는 날마다 힘이 부치지만

네가 자라 가꿀

보리밭 명밭 콩밭을 부지런히 넓혔었지.

뒷산 그늘이 내려와 강물에 드리워지면

풀꽃들이 서늘히 드러나고

산그늘이 앞산을 오르며

어머님을 덮으면

허리를 펴며 땀을 식히시던

어머님의 넉넉한 노동의 하루.

그러면 나는 잠든 너를 산그늘로 덮어 잠재우고

부지런히 저녁 밥솥에 불을 땠었다.

지던 해가

앞산 머리에 뚝 떨어지면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줄줄이 풀 속을 내려오던

어머님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들,

함께 강가에서 만나 손발을 씻던

그 싱싱한 모습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즐거워지고

가슴이 뛴다.


너희들이 자라 차례차례 어머님과 내 등을 떠나고

밭들은 묵어 잡풀들이 우북하게 자라

풀꽃들을 피운다.

저 꽃을 꽃이라 부르면

내 허전한 등에선

설운 물소리가 들리고

나는 돌아서서 서럽단다.

누가 저 꽃을 꽃이라 부르랴.


누이야

어머님들이 아침저녁으로 다니던

정답던 길들은

키보다 더 큰 풀들이 자라

길을 메우고

밭 입구도 이제는 지워져 있다.

신발 벗어 가지런히 모아두고

새참을 얹어두던

빤질거리던 바위도 이제는 이끼만 푸르단다


밤 한쪽만 우리끼리 먹어도

목에 걸려 생각나는 누이야

저 산굽이 돌아오는

물굽이 끝을 보며

누이야 하고 부르면

지금도 내 등에선

가지런한 숨소리가 들리는구나.


오늘도 어머님은 밭 귀퉁이부터

지심들을 매어간다.

네가 시집가면 만들어줄

이불솜을 해마다 가꾼단다

어머니의 등짝처럼

벌겋게 드러나는 밭은

덴 자욱처럼 뜨거워 보이는구나.

누이야

저 밭을 이제 누구에게 물려주고

고시랑고시랑 집안에서

이것저것 잔소리로 늙으랴.


내 등을 적시며 배고파 울던 누이들아

오늘밤은 달빛이

앞산 머리에 유난하구나

요새 고향 달빛도

달빛 아래 마을도

타향같이 쓸쓸하기만 하다.

누이야

저 달빛 아래

저 앞산 밭 자갈들 틈속에

어머니들의 닳아진 손톱

저 반짝이는

눈물 같은 손톱으로

우리 이 땅에 숨쉬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