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쌀

 

그대여

내가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무논을 지나

어떻게어떻게 그대 앞에 섰을 때

그대가 내게 준 것은 한아름의 화사한

봄산이 아니라

천근만근 들 수 없는

돌덩이같이 캄캄한

절망의 산이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뙤약볕 내리쬐는

숨막히는 폭염의 황톳길을 지나

다시 그대 앞에 섰을 때

그대가 내게 짊어준 것은

한 짐 짊어지고 일어설 수 있는

아침 산이 아니라

일어설 수 없이 무거운

저문 산이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이 가을 들판을 지나

사랑하는 국토의 갈라진 끝으로

그대를 만나러 가는 것은

절망의 철조망에다

희망의 불을 밝히는

따뜻한 희망의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대여

벼 다 쓰러져 떠나가는

이 빈 들판에 아직도 내가

이렇게 서리 맞은

재래종 늦벼로 서서

그대가 준 절망을 짊어지고

이렇게 그대를 향해 그리움에 설레는 것은

이제는 내가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이

이 자리에 선 채로

그대 앞에 쓰러지며

마지막으로 부려야 할 것이

사랑이 아니라

반쪼가리의 사랑이 아니라

새 세상이 훤하게 열리는

우리 땅의 빛나는 새 모습

탄생의 새하얀 쌀,

통일과 해방의 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통일과 해방의 햅쌀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