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날들 - 류시화

 

물 속에서 건방지게

나를 노려보던 놈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무 뒤에서 나를 지켜보던

어린 놈도

묵상하는 자세로 모래 위를 기어가던

뿔 달린 놈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들이 간 곳은 어딜까.

아마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인 듯하다.

물 위에서 하루 종일

철학자의 자세로 엎드려 있던 놈도

갈퀴 달린 입으로

잎사귀 위에다 시 쓰는 연습을 하던 놈도

어디론가 떠나갔다.

이러다간 내 삶도 어느 날

사라져 버릴 것 같다.

그들이 내 곁에 있을 때는 삶이 이렇지 않았었다.

그때는 사는 것이 달랐었다.

거미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않는다.

지난 여름에 지었던 집을

조금 고쳐서 쓸 뿐

우렁쉥이는 또 모래구멍 속에 틀어박혀

더 이상 고개를 내밀지 않는다.

이제 자연은 사라지고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