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할리우드의 전설" 그레고리 펙
 
( 1916년 4월 5일 ~ 2003년 6월 12일)
 
할리우드 스타의 거리에 새겨진
할리우드 대로에 찍은
그레고리 펙의 ‘별’
그레고리 펙의 ‘손자국과 발자국’

그레고리 펙 소개

그레고리 펙은 1916년 4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 라 졸라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5살 때 부모님 이혼으로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며, 샌디에고 고등학교 졸업 후
UC버클리대 의대에 진학했지만, 연극에 심취해 전공을 문학과 연극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레고리 펙은 1939년 대학졸업 후 뉴욕으로 건너가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 연기학교에
입학해 착실하게 연기공부를 했으며, 1942년 연극 ‘더 모닝 스타’의 주연으로 발탁되어
브로드웨이 무대에 처음으로 섰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1944년 영화 ‘영광의 나날들’로 스크린에 데뷔를 했습니다. 첫 데뷔작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두 번째 작품 ‘천국의 열쇠’(44년)에서 사려깊은 신부 역을 맡아
열연하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레고리 펙은 이후 ‘가장 특별한 선물’(46년), ‘신사협정’(47년)으로 46년, 47년, 48년
3년 연속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정오의 출격’(49년), ‘앵무새 죽이기’(62년)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모두 5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릅니다.
또한 그가 주연한 영화 9편이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레고리 펙은 ‘앵무새 죽이기’(62년)에서 자상하고 민주적인 아버지이자, 백인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억울하게 투옥된 흑인청년을 구명하는 데 앞장서는, 정의로운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 역을 맡아 196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2000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고별무대 ‘그레고리 펙과의 대화’에서 그는 “내가 한 수많은
역할 중 애티커스 핀치가 나와 가장 닮은 인물이었다. 그 때가 내 연기 인생의 절정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법정에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외쳤던 그의 영화 속 대사는
민권운동의 슬로건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미국영화연구소가 선정한
‘100년 영화사상 100인의 영웅’ 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리 펙은 1947년 ‘가장 특별한 선물’(46년), 1963년 ‘앵무새 죽이기’(62년)로 골든 글러브
남우주연상, 1951년과 1955년에는 각각 골든 글러브 세계영화 인기남우상을 수상했으며,
1999년에는 ‘백경’(98년)으로 83세의 나이에 골든 글러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외에 1950년 ‘정오의 출격’(49년)으로 뉴욕 비평계 남우주연상, 1968년 진 허숄트 인도주의상,
1983년 미국 국립 비평위원회 생애업적상, 1989년 미국영화연구소 평생업적상, 1989년 칸 영화제
특별상, 1993년 베를린 영화제 명예 황금곰상, 1998년 독일영화 평생업적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상을 수상했습니다.
1969년에는 린든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암협회 회장을 지낸 공로로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의 메달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상했습니다.
그레고리 펙은 오드리 헵번과 호흡을 맞춘 ‘로마의 휴일’(53년)에서 신문기자 조 브래들리 역을
맡아 전세계 영화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1993년 타계한 오드리 헵번은 그를 일컬어
“위대한 남자의 단순함, 단순한 남자의 위대함을 보여준 배우”라며 “우리시대의 진정한 남자”
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그레고리 펙은 ‘로마의 휴일’에서 유명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계약서가 나왔는데 ‘그레고리 펙의
로마의 휴일 오드리 헵번 첫 출연’ 이더군요. 그래서 전화를 걸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아주 웃긴 일이 될 거라고 말이죠. 이 신인 여배우는 이번 작품으로 아카데미
상을 받을테니 그녀와 내 이름을 제목 위에 나란히 올려야 한다고 했죠. 그건 제가 단순히
너그러움을 보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안하면 이상했을 겁니다.”
그레고리 펙은 자신의 역할을 잘 아는 배우였으며, 상대 배우의 명연기를 끌어낼 줄 아는
배우였습니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의 명연기도 그레고리 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 펙은 60여편의 영화에서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주로 도덕적이고 정의감 있는
인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도덕적이고 성실한 모습 그대로를 실제의 삶 속에서도
보여주어 타인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1942년에 결혼한 첫 아내와 이혼 후, 1955년 프랑스 여기자 베로니크 파사니와 재혼해 평생을
함께 했으며, 영화에서의 성실한 이미지처럼 사생활에서도 스캔들 한 번 없이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했습니다.
그레고리 펙은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미국 영화연구소 초대 의장, 미국 암협회 회장,
미국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협회 회장, 미국 영화 TV 구호재단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민주당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각종 자선단체를
포함한 여러 비영리단체에서 맹렬히 사회활동을 벌였으며, 자선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사회에 봉사를 했습니다.
그레고리 펙은 베트남전에 자신의 아들을 참전시켰지만 한편으로 반전시위에 앞장섰는데,
“국민의 도리는 하지만 잘못한 일은 지적해야 한다”는 그의 평소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1972년에는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영화를 제작했으며, 1987년에는 고르바쵸프 치하의 소련에
초청되어 “핵 없는 세상과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리 펙은 말년에도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강연을 펼쳤습니다.
언제나 완벽한 영화를 만드는 꿈을 지녔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믿는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으며 죽음도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즐기는 일들을 할 뿐이다.”
2000년 고별무대에서 했다는 이 말은 그레고리 펙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살아생전 “살아있는 할리우드의 전설”로 불렸던 그레고리 펙은, 2003년 6월 12일 새벽 4시
향년 87세로 48년 동안 해로해온 사랑하는 아내 베로니크의 손을 잡은 채 평온하게
천국의 휴일로 떠났습니다.
별세 소식이 전해진 후,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배우들의 위엄있는 아버지”, 원로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성실과 정직의 상징”, 그리고 원로배우 폴리 버건은 “완벽한 신사” 였다면서
그를 기리고 애도했습니다.
그레고리 펙은 비록 이 세상을 떠났지만, “영원한 할리우드의 전설”로서 언제나 세계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레고리 펙은 시대의 진정한 스타였으며, 그 별은 영원히
하늘에서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후세에 남긴 모범적인 모습과 훌륭한 인간성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커다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나신 그레고리 펙이 그립습니다.

그레고리 펙의 주요 사진을 모았습니다.

 
1963년 제3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오스카 트로피를 받고...
1999년 골든 글러브상을 받고...
 
   62년 아내 베로니크와 함께...          97년 아내 베로니크와 함께...
99년 아내 베로니크와 함께...
 
          65년 아내 베로니크와 함께...                                  67년 아내 베로니크와 함께...
 

'로마의 휴일' 명장면을 모았습니다.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주요 영화 포스터입니다.

44년 '천국의 열쇠'
       45년 '스펠바운드'
46년 '가장 특별한 선물'
46년 '백주의 결투'
       47년 '신사협정'
49년 '정오의 출격'
50년 '건파이터'
   52년 '킬리만자로의 눈'
53년 '로마의 휴일'
56년 '백경'
       58년 '빅 컨트리'
59년 '그 날이 오면'
61년 '나바론 요새'
       62년 '케이프 피어'
62년 '서부 개척사'
62년 '앵무새 죽이기'
       63년 '뉴만 대령'
66년 '아라베스크'
69년 '맥켄나의 황금'
       76년 '오멘'
77년 '맥아더'
78년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89년 '올드 그링고'
98년 '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