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아래서

 

그해 봄 저는 살구꽃이 눈발처럼 떨어져 내리는 살구나무

아래 있었는데요 진보라 제비꽃 옆으로 떨어져 내리는

살구꽃잎을 손에 들고 살구꽃 향내에 취해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야 느낄 수 있는 살구꽃 향처럼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낮은 곳으로 내리는 꽃잎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제게 남은 향기가 있다면 이 궁벽진 산기슭에

다 쏟아붓고 싶었는데요


고개를 돌리면 살구꽃잎보다 많은 아이들 얼굴

그 아이들과 함께 내 있는 곳도 천계나 무색계가 아닌

욕계의 언덕이어서 강을 건너는 방법을 일러주는 어려운 일말고

그저 물가에서 물장난이나 할 때가 많았는데요 쉬어버린 목청을

꽃바람에 식히며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곤 했는데요


꽃 그늘 속에서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지나온 십여년이

꿈만 같아서 눈물도 바람도 흐르는 강물 같아서 지는 꽃잎이 고요하듯

그렇게 지난 세월도 고요해져서 몇 시간씩 무설전에나 든 것처럼

말없이 강 건너를 바라다 보고 있을 때도 있었는데요


아수라의 한복판에도 연꽃을 든 이가 나타나고

갈림길에 이를 때마다 길 물을 수 있는 초동목부를 만나

이제껏 길 잃지 않고 온 것이 한없이 다행스럽고

화택의 불길 속에서도 물보라 같은 아이들 웃음 만나

오늘 또 하루를 살았다는 생각으로 혼자 고마워하곤 했는데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인연들과

다시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되풀이하며 비탈진 언덕에

꽃을 심곤 했는데요 딱딱한 땅을 파고 심은 꽃씨들이

은은하고 깊은 업연으로 이어져 피어나길 바라며

눈발처럼 지는 살구꽃 나무 아래 서 있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