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페이지의 행복
고교시절, 아주 아끼던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유달리 그 책을 아꼈던 것은
책에 담긴 글 때문이 아니라 먼 곳에서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예쁘게 포장해 보내준 그때 그 사람의 손길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어쨌거나 난 그 책을 늘 몸에 간직하고 다니면서도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책을 선물받던 그 날,
이미 반 이상이나 읽어버린 나는
다음날부터 아껴가며 몇 장씩만 읽어갔기에.
읽어넘긴 책장이 두꺼워질수록 그 책을 읽는,
아니 그 사람의 손길을 느끼는 행복이 줄어드는 것만 같아
내 안타까움도 더해갔고요.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쪽만 남겨놓은 그 책은
내가 그 책을 선물한 사람과 통화를 하는 동안 공중전화기 뒤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붐비는 역 앞이었는지라
손가락도 잘 닿지 않는 책을 꺼내기 위해
전화부스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고,
전화부스 뒤쪽에서 전화기와 부스 유리 사이에 갇힌
그 책만 멍하니 바라보다 나는 힘없이 돌아서야 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길다란 집게를 들고 그곳까지 달려갔지만
이미 그 책이 사라진 뒤였습니다.
그때의 허탈감이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다섯 페이지 만큼의 행복이
항상 내 뒤에 남아 있는 것 같아
오히려 푸근해지기도 했으니 참 우스운 일이지요?